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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다산초당 답사기

2010.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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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과 목민심서

  지난 3월 셋째 토요일 서울지방변호사회 문화유산답사팀의 일원으로 다산초당에 답사를 다녀온 일이 있다. 먼 일정을 당일치기로 소화하려고 새벽부터 서두르다 보니 버스에 오르자 마자 곤한 잠에 빠졌들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문뜩 깨어보니 차창 밖엔 남도의 강렬한 태양 아래 시뻘건 황토빛 들판과 그 사이사이로 이어진 보리밭이 연두빛 실크 같은 고운 자태로 봄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남도의 너른 들판 사이를 거침없이 달려 골기(骨氣) 왕성한 월출산을 뒤로한 채 다산 정약용이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전남 강진으로 향했다.

  다산 정약용이 태어나던 1762년(영조 38)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하면서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노론계 벽파와 사도세자를 옹호하는 남인계 시파간의 반목과 대립으로 조선정국은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하던 세력들은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 ; 罪人之子 不爲君王’는 팔자흉언(八字凶言)을 퍼뜨리며 세손(世孫)이던 정조의 차기 왕위계승권 마저 부정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정조는 1776년 사도세자의 형인 효장세자의 후사(後嗣)로서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다산은 정조의 등극과 함께 시파에 속해 있던 부친이 내직(內職)에 천거되자 한양에서 남인계 명사들과 교유(交遊)할 기회를 얻게 되면서 성호 이익의 유고(遺稿)를 읽고 실학에 심취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21세에 초시와 회시에 합격한 것을 시작으로 28세에 전시(殿試)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올라 조선의 르네상스라 할 수 있는 정조시대 찬란한 문물의 꽃을 피우는데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배다리(舟橋)와 수원성을 설계하고 기중기를 제작하였으며, 황해도 곡산부사 시절에는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저술하여 천연두에 대한 치료책을 보급하는 등 실학자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1800년 여름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11세의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하게 되자, 순조의 증조할머니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으로 정권을 장악하면서 노론계 벽파 천하가 된다. 이듬해 정순왕후는 정조의 비호를 받던 남인을 제거할 목적으로 이른바 신유사옥(辛酉邪獄)을 일으킨다. 이때 다산의 자형 이승훈 신부와 셋째형 약종은 처형당하고, 둘째형 약전은 전라도 완도군 신지도로, 다산은 경상도 영일군 장기로 유배당하게 된다. 그런데, 그해 9월 천주교 탄압을 피해 충청도 제천의 토굴(현 배론성지)에 숨어 지내던 맏형 약현의 사위 황사영에 의한 백서(帛書)사건이 터지자 1801년 음력 11월 둘째형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각각 이배(移配)된다.

  오랏줄에 묶인 채 매서운 눈보라를 안고 강진에 도착한 다산에게는 누구 하나 거들떠 보는 사람도 없이 말을 붙이기 조차 꺼려하며 혹여 후환이 두려워 숙소를 내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산은 추위와 굶주림 속에 동문 밖 주막집 노파의 따뜻한 인정으로 뒷방 하나를 간신히 얻어 거처로 삼고, 그곳에 ‘생각․용모․언어․동작의 네가지를 의로써 규제하여 마땅하게 하여야 할 방’이라는 의미에서 사의재(四宜齋)라는 당호를 걸고 마을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다산이 목격한 백성들의 모습은 절망 그 자체였으며, 1803년(순조 3) 강진의 노전(蘆田)마을에서 한 농부가 생후 3일 된 아이를 군적에 올려놓고 군포 대신 소를 빼앗아 간 관리에게 항의하면서 자신의 생식기를 자르며 절규하는 모습을 본 다산은 애절양(哀絶陽)이라는 한편의 시조로 당시의 참상을 고스란히 전해 주고 있다.

蘆田小婦哭聲長(노전소부곡성장)     노전의 젊은 아낙 울음소리도 길어
哭向懸門呼穹蒼(곡향현문호궁창)     현문을 향해 슬피울며 하늘에 호소하네
夫征不復尙可有(부정부복상가유)     출정나간 남편은 못 돌아올 수도 있지만
自古未聞男絶陽(자고미문남절양)     남자가 양경(陽莖)을 자른단 말 듣지 못했네
舅喪己縞兒未澡(구상기호아미조)     시아비 상복 막 벗고, 아기는 탯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三代名簽在軍保(삼대명첨재군보)     삼대가 모두 군적에 실렸구나
薄言往愬虎守閽(박언왕소호수혼)     몇마디 호소하러 가니 호랑이 같은 문지기 서있고
里正咆哮牛去皁(이정포효우거조)     이정의 호통에 외양간 소만 없어졌네
磨刀入房血滿席(마도입방혈만석)     칼갈아 방에 들어가 유혈이 낭자한데
自恨生兒遭窘厄(자한생아조군액)     애 낳아 이런 고생한다며 자탄을 하네
                            (중          략)
豪家終歲秦管絃(호가종세진관현)     부유한 집은 일년 내내 음악만 연주하며
粒米丁帛無所捐(입미정백무소연)     쌀 한 톨 비단 한 치 내놓지 않네
均吾赤子何厚薄(균오적자하후박)     다 같은 백성인데 후박이 웬말인가
客窓重誦鳲鳩篇(객창중송시구편)     여관에서 자꾸만 시구편을 외노라

- 목민심서, 兵典六條, 제1조 첨정(簽丁) 편에서 인용 -


  ※ 시구편(鳲鳩篇) : 詩經에 실린 작품, 통치자는 백성을 고루 사랑해야 한다는 내용을 뻐꾸기(鳲鳩)에 비유한 것

  일찍이 서학(西學)을 접하면서 인본사상(人本思想)에 눈을 뜬 다산으로서는 위와 같은 참상 앞에서 죄인의 신분으로 몸소 목민(牧民)을 실행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마음으로나마 목민하리라는 당시의 절절한 심정을 담아 훗날 심서(心書)로써 후세에 전했던 것이다. 다산은 벽파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거두어지고 순조의 장인인 시파 김조순이 정권을 거머쥐면서 자신에 대한 감시가 느슨해지자, 1808년 외가인 해남윤씨 일문의 배려로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 뒷산 만덕산 중턱의 초당(草堂)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해배(解配)될 때까지 11년간 기거하면서 목민심서 등 500여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을 남기게 된다.

  새벽을 뚫고 먼 길을 쉴새 없이 달려온 버스는 우리 답사팀을 다산초당 뒤편 백련사 입구에 내려주었다. 백련사는 다산이 유배시절 선(禪)과 차(茶)로 승속(僧俗)을 떠나 각별히 교유(交遊)했던 혜장스님이 주석하던 곳이다. 주차장에서 백련사로 오르는 길은 천연기념물 151호로 지정된 동백숲으로 뒤덮혀 있다. 빼곡한 동백나무 숲을 뚫고 언뜻언뜻 터진 틈으로는 남도의 강렬한 봄볕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 어둑한 숲속을 걷는 답사객들에게 신비로움을 더해주고 있었고, 동백꽃이 뚝뚝 떨어지면서 만들어 낸 자연 그대로의 꽃무늬 양탄자는 답사객들의 발걸음을 차마 멈추게 하였다.

  우리가 백련사에 도착했을 때에는 대웅보전 앞 만경루에 대한 개수공사가 한창이었고, 어지럽게 널려진 공사판 사이로 해묵은 배롱나무 한그루가 유배객의 모습인 양 해쓱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우리는 백련사 경내를 돌아 좌측으로 활짝 트인 강진만에서 미풍에 실려오는 갯내음을 맡으며 만덕산 허리춤에 걸린 오솔길을 따라 다산초당으로 향했다. 외국산 수입목으로 계단을 만들어 놓아 고졸(古拙)한 옛 멋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주변에 흩어져 자생하고 있는 수많은 앉은뱅이 차나무에서 200여년 전 다산의 손길을 느끼며, 혜장스님을 만나러 수없이 이 길을 걸으며 다산이 품었을 유배객으로서의 한(恨)과 고뇌를 되새겨 보면서 이윽고 다산초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산이 기거했던 초당은 오랜 세월에 낡고 쓰러져 1958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가 옛 건물터에 중건한 와가(瓦家) 팔작집이다. 다산초당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동암(東庵)과 서암(西庵)이 중건되어 있으며, 해배(解配)를 앞두고 발자취로 남긴 정석(丁石) 바위가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여 마셨던 초당 앞마당의 다조(茶竈 ; 차부뚜막)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초당 뒤편의 약천(藥泉), 초당 동편에 축대를 쌓아 만들어 놓은 연지(蓮池)와 함께 ‘다산4경’으로 남아 답사객들에게 다산의 체취를 느끼게 해 준다. 우리는 천일각(天一閣)에 올라 손에 잡힐 듯이 내려다 보이는 구강포구를 바라보며 18년 유배객으로서의 회한과 아픔 속에서도 목민심서(牧民心書)로 나마 백성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던 다산의 위대한 뜻을 되새겨 볼 수 있었다.

  200년 전의 다산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의미있는 이유는 그의 민본주의(民本主義) 철학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또 다시 선거철을 맞이하고 있다. 선거철만 되면 의례히 국민이 주인이라며 연실 굽실거리는 정치지도자들과 마주치게 된다.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J. Bentham)이 대의민주정치를 주창한 이유는 국가권력이 투명하게 행사될 수 있도록 감시하라는 취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의회는 제 스스로 권력화함으로써 오히려 감시를 받아야 할 권력으로 부상하였고, 정파에 따라서는 노골적으로 정부권력을 비호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반갑다고 다가서며 민본(民本)을 부르짖는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은 반짝 선거용이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의 21세기를 이끌어 나갈 제2,제3의 다산(茶山)일 것이라는 희망섞인 기대를 가져본다.


변호사     오     종     윤

                                  

-  댄스스포츠코리아  2004.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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