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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관중과 공명의 청렴지수

201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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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관중과 공명의 청렴지수


  불과 얼마전까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G-씨티 사기분양 사건 관련 공직자 비리가 잊혀질만 하였더니 이제는 재벌기업과 관련된 불법 대선자금이니 뭐니 하는 문제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형국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 어느때 보다도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해 낼 수 있는 새로운 지도자와 리더쉽을 갈망하고 있다. 비리로 얼룩진 보도를 접할 때 마다 지도자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기본덕목이 무엇일까 새삼 되새겨 보게 된다.

  중국역사상 춘추시대 제나라의 재상 관중과 후한말 촉나라의 승상 제갈공명은 지극히 혼란했던 시대에 뛰어난 리더쉽으로 새역사의 장을 개척한 대 정치가이자 전략가였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관중은 춘추시대 제나라 제14대 양공으로부터 생명에 위협을 느낀 제양공의 아우 공자 규(糾)를 보필하여 노나라로 피신하게 된다. 제양공은 노나라 환공에게 시집간 여동생과 음행을 저지르다가 이를 눈치챈 노환공을 죽여 버리는 등 패악무도한 정치를 일삼다가 사촌 공손무지의 반란으로 살해되었고, 공손무지 또한 재위 1년이 못되어 사망하였다. 그러자 제나라의 대부 고혜(高傒)를 중심으로 포숙과 함께 거(莒)나라로 피신해 있던 공자 소백(小白)을 불러들여 왕위를 계승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공자 규가 차자(次子)로서의 왕위계승 우선권을 주장하며 귀국을 서두르게 되자, 관중이 먼저 달려가 제나라로 향하는 공자 소백에게 화살을 날리게 된다. 그러나 화살은 공자 소백의 허리띠에 달린 쇠고리에 맞았고, 사태를 간파한 포숙의 지혜로 공자 소백은 죽은 것으로 가장하여 공자 규를 안심시켜 놓고 재빨리 제나라로 귀환하여 제나라 16대 군주에 오르니, 그가 바로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인 제환공이다.

  관중은 위와 같이 제환공에게 화살을 겨눈 것에 그치지 않고, 공자 규의 외가인 노나라에 도움을 청하여 제나라로 쳐들어가는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하였음에도 포숙의 천거로 제나라 상경(上卿)의 자리에 올라 재상이 되었고,  30국이 넘는 주변 제후국을 복속시켜 마침내 제환공을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로 등극시키게 된다.

  한편, 제갈공명은 관리들의 수탈과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이 태평도라는 종교를 구심점으로 일으킨 이른바 ‘황건적의 난’이 중국 전토를 휩쓸던 후한말 어지러운 시기에 유비로부터의 세 번에 걸친 간절한 청에 이끌려 융중에서 몸을 일으킨다. 공명이 천하 삼분지계로써 유비를 보좌하여 조조세력에 의한 천하재편을 막아내며 한황실의 회복과 천하통일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결과, 형주의 유표에게 의탁해 있던 떠돌이 무장(?) 유비를 정점으로 촉나라를 건국하여 위․촉․오 삼국을 정립시키는 위대한 역사의 장을 열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다.

  위와 같이 관중과 공명은 난세를 극복해 낸 탁월한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관포지교(菅鮑之交) 또는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유명한 고사를 남길 정도로 매우 극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는 서로간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재물과 권력에 대한 공직자로서의 자세는 사뭇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즉, 관중은 재상이 된 후에 “빈불능사부(貧不能使富), 가난한 자는 부자를 다스릴 수 없다”하여 제환공으로부터 상업세를 거둘 수 있는 독점적 권리를 부여받아 엄청난 재물을 얻었고, 더 나아가 “소불능제친(疎不能制親), 군주와 먼 사이로는 군주의 친족을 다스릴 수 없다”하여 제환공으로부터 중보(仲父)의 지위까지 부여받아 혈육이 아니면서도 제환공의 친족인 지위에서 천하의 권력을 한손에 거머쥐었음은 물론 제왕과 같은 호사와 사치를 누렸으며, 공자께서도 논어 팔일(八佾)편에서 이점을 따끔하게 지적하고 있다.

  반면, 공명은 장수 이엄으로부터 ‘유선의 능력이 모자라면 직접 촉나라의 주인이 되어도 좋다’는 유비의 유언을 근거로 ‘마땅히 작위를 높이라’는 권고를 받게 되자, 오히려 자신이 이룬 업적이 없음을 밝히며 몸을 낮추었을 뿐만 아니라, 후주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린 다음 위나라 정벌에 나섰다가 명령을 어기고 패배한 장수 마속을 참(斬)하면서는 스스로 표문을 지어 ‘패전의 원인이 사람을 잘못 가려 쓴 자신에게 있다’고 죄를 청하였던 결과, 승상에서 3등급 낮은 우장군으로 스스로 강등당하는 책임있는 지도자로서의 리더쉽을 발휘함으로써 자리나 직위에 연연하지 않는 지도력을 몸소 실천하였다.
  어디 그 뿐이랴. 공명이 마지막으로 후주 유선에게 표문을 올리고 오장원에서 57세의 생을 마감하였을 때, 과연 공명이 남긴 재산이라고는 표문에 나타난대로 ‘성도에 있는 뽕나무 800그루와 메마른 밭 열다섯 경(頃)’ 뿐이었다고 하니, 30여년간이나 촉나라의 권력을 한손에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사사로이 재산을 모으지 않았다는 놀라운 청렴성에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게 한다.

  어찌 보면 관중은 제환공을 패공으로 등극시킨 역사의 승자인 반면, 공명은 삼국통일의 염원을 이룩하지 못한 채 전장에서 스러져간 역사의 패장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지도자들의 도덕적 해이와 각종 비리로 얼룩진 현실을 접하게 되면서 전장에서 스러져간 패장의 역사가 가슴이 저미도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까닭은 지도자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기본덕목이 도덕적 청렴성이기 때문일까?

                          

<변호사  오 종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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