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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패러디

201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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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칼럼]

패러디(Parody)

  요즈음 우리 사회는 패러디(Parody) 홍수로 넘쳐나고 있다. 과거 오락프로나 상업광고 정도에서 간간히 패러디물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이 최근에는 TV 뉴스시간에도 ‘헤딩라인 뉴스’와 같은 시사 패러디물이 방영될 정도이며, 아예 딴지일보와 같은 독자적인 패러디 언론매체가 성업 중에 있다. 어쩌다 인터넷에서 패러디라는 검색어를 입력해 보면 그야말로 놀랄만큼 엄청난 패러디 관련 사이트가 줄줄이 올라온다. 게다가 디지털카메라와 포토숖 기술이 대중화되면서 사이버 공간에는 포스터나 사진을 합성하여 만들어진 각종 패러디물들이 범람하고 있다. 바야흐로 패러디 전성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패러디(Parody)란 무엇일까. 우선 백과사전에서 족보부터 찾아보니 패러디(Parody)는 대응노래(counter song)를 뜻하는 희랍어 “para + odia”에서 유래된 것으로, 어떤 저명 작가의 시의 문체나 운율을 모방하여 그것을 풍자 또는 조롱삼아 꾸민 익살 시문(詩文)으로서 문학작품의 한 형태라고 소개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의 풍자시인 히포낙스를 시조로 하여 중세에는 교회나 성서 등에 대한 조소(嘲笑)의 형태로 음유시인(吟遊詩人)에 의해서 음유되어 오다가 18세기 이후 유럽에서 널리 유행하였으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Don Quixote)가 패러디 문학작품의 하나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패러디는 문학작품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의사소통 기능을 담당하는 표현기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따라서 패러디란 그 표현형식의 여하를 불문하고 널리 알려진 원저작물을 재미있게 흉내내거나 과장되게 왜곡시킴으로써 대상 작품이나 사회적 상황을 익살 또는 풍자하는 해학적 비평형식이라 할 수 있다.

  패러디, 어디까지 허용되나

  그렇다면 유머나 비평을 위하여 원저작물을 희화화(戱畵化)하기만 하면 곧바로 패러디로 허용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대답은 단연 ‘노우(No)’다. 아무리 패러디의 의도로 원저작물에 희화적(戱畵的) 변형을 가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단지 어설픈 모방이나 변형에 그친 것으로 평가된다면 패러디로 보호될 수 없는 것은 물론 저작권 침해에 따른 책임 마저도 면할 수 없다. 결국 패러디로 인정되기 위하여는 해학과 비평이라는 패러디 본래의 가치를 지향하여야 함은 물론 원저작물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새로운 가치의 창출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만 대가없이 타인의 저작물을 사용한 것이 정당화(fair use)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패러디로 인정되는 경우라도 타인의 명예나 인격권 등을 침해하여서는 안된다는 제한은 여전히 남는 것이다.

  현행 저작권법 제25조에도 “공표된 저작물은 보도, 비평, 교육, 연구 등을 위하여는 정당한 범위 안에서 공정한 관행에 합치되게 이를 인용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패러디와 같이 비평을 위하여 타인의 저작물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정당한 범위 안에서 공정한 관행에 합치되어야 하는 제한을 두고 있다. 나아가 패러디에 관한 민사판결로는 서울중앙지방법원이 2001. 10. 대중가요 ‘컴백홈’ 패러디 사건에서 ‘원곡에 나타난 음악적 특징을 흉내내어 단순히 웃음을 자아내는 정도에 그쳤을 뿐, 원곡에 대한 비평적 내용을 부가하거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패러디 주장을 배척함으로써, 단순히 원저작물을 희화화(戱畵化)하는 것만으로는 패러디라 할 수 없다고 판시한 사례가 있으며, 형사판결로는 17대 국회의원 총선 과정에서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정치인의 얼굴을 합성한 포스터 등의 패러디물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선거법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안에서 법원이 잇달아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패러디에 의한 표현의 자유도 제한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가 있다.

  비판과 수용의 문화

  요즈음 우리사회에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널리 퍼져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민주주의의 우수성이 대화와 타협에 있음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화와 타협을 위하여는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할 줄 아는 자세가 필연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나친 이분법적 사고에 빠져 편가르기를 한다면 상대는 더 이상 대화나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한낱 방해물에 불과한 존재로 인식될 것이고, 이러한 풍토에서라면 서로간에 우격다짐과 밀어붙이기식의 대응과 맞대응이 있음은 모르되, 서로에게 좋은 약이 될 만한 비판과 수용의 문화가 뿌리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매년 9월이면 안동 하회마을에서 하회별신굿탈놀이와 만날 수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봉건적 신분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면서도 이를 풍자와 해학으로 승화시킬 줄 알았던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평소 지체 높은 양반들 밑에서 숨 죽여가며 고단한 삶을 살았을 상민(常民)들이 한껏 지체와 학식을 자랑해 오던 양반과 선비들의 허상과 위선을 폭로함으로써 반상(班常)의 구별이 한갖 헛된 것임을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탈마당에 나온 양반은 ‘할아버지가 문하시중(門下侍中) 벼슬을 지낸 사대부(士大夫)의 자손’이라고 지체 높음을 자랑하고, 이에 질세라 선비는 ‘사대부의 갑절인 팔대부(八大夫)의 자손으로 아버지가 문상시대(門上侍大) 벼슬을 하였다’고 맞선다. 이어서 선비가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다 읽었노라며 학식자랑을 늘어놓으면, 양반은 팔서육경(八書六經)을 읽었다며 둘러대는데, 이때 사서삼경도 모르면서 잘난체하는 양반네들을 향하여 초랭이가 나서서 ‘팔만대장경, 중의 바래경, 봉사 안경, 약국의 길경, 처녀의 월경, 머슴 새경’이 육경(六經)이라며 지배계층의 지체와 학식 다툼이 한낱 허구임을 비아냥거린다. 또한 백정이 양기(陽氣)에 좋다고 들고나온 소불알을 양반과 선비가 서로 사겠다며 잡고 늘어지며 다투는 장면에 이르면, 보다 못한 할미가 “소불알 하나 가지고 양반은 지 불알이라 카고. 선비도 지 불알이라 카고. 백정놈도 지 불알이라 카이” 하며 양기(陽氣)에 좋다는 말에 체면이고 염치고 내팽개치는 지배계층의 위선을 신랄하게 풍자함으로써 웃음거리로 만들고 만다.

  그뿐 아니라 탈놀이를 하는 동안에는 평소 하대(下待)받던 탈광대들이 대가집 사랑에 올라 범같이 지체높은 양반과 맞담배질을 하고, 예사로 막말을 하거나 무례한 짓을 해도 이를 탓하지 않는다. 탈놀이에서는 아무리 지체높은 양반이라도 이러한 수모는 기꺼이 감내하면서 오히려 먹고 마실 것을 내 주며 반상(班常)을 떠나 함께 어우러졌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 조상들은 양반과 상민(常民)들이 그 신분을 떠나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함으로써 한편에서는 상대에 대한 비판을 풍자와 해학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들에게 퍼부어지는 비아냥거림을 풍자와 해학으로 수용할 줄 아는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하회별신굿탈놀이가 고려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수백년간에 걸쳐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이며, 그곳에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동반자 의식이다.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남아 있는 한 상대를 향한 비판은 자칫 적대감의 표출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러한 토양에서 건강한 비판과 수용의 문화가 뿌리내리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자객(刺客) 전제(專諸)는 요리사로 가장하여 오왕(吳王) 요(僚)를 살해하려고 생선요리 속에 칼(魚藏劍)을 숨긴다. 오늘날 이분법적 편가르기와 초고속 디지털 문명에 편승하여 패러디라는 미명하에 상대(target)를 노린 어장검(魚藏劍)을 숨겨놓는 사례가 혹여라도 있지 않을까 염려된다면 지나친 기우(杞憂)일까.

 

변호사     오     종     윤

- 댄스스포츠코리아 2004.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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