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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과거사 청산, 사법부에 정의를 묻는다

201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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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과거사 청산’ 사법부에 정의를 묻는다

2007-03-21 오후 1:08:46 게재

‘과거사 청산’ 사법부에 정의를 묻는다
이 창 훈 (서울지방변호사회 부회장)

‘결국 정의가 이기게 될까.’ 재판의 역사를 다룬 어떤 교양서의 서문에 씌여져 있는 질문이다. 이 문제제기는 왠지 불안하다. 사법부가 정의롭다면 결국 정의가 이기게 될까. 과연 사법부는 정의로운가. 이 질문은 지나치게 논쟁적이어서 불편하다. 대체 정의란 무엇인가.
올해 1월 서울중앙지법은 인혁당사건 재심재판에서 ‘피고인들에 대한 고문과 협박 등이 인정되고, 검찰조서 등의 증거능력이 없다’면서 도예종씨 등 8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고 18시간만에 사형이 집행된 지 32년만의 일이다. 마침내 진실이 밝혀졌으니, 결국 정의가 이기게 된 걸까. 그렇다면 잠정적으로, 정의란 진실을 뜻하는 걸까. 진실을 밝혀냈으니 사법부는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진실은 정말 사법부가 밝혀낸 것인가.
재판이란 ‘지금-여기’의 재판만이 의미가 있다. 그래서 재판은 늘 ‘지금-여기’의 재판이어야 하고, ‘지금-여기’의 재판만이 현실의 재판이다. 목숨을 건 재판을 받고 있는 피고인들에게 ‘지금-여기’의 재판이 아닌 ‘몇년 후-거기’의 재판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혁당 재심, 정의의 승리인가
사법부는 인혁당사건의 진실을 32년 전 ‘지금-여기’의 재판에서 밝혀냈어야 한다. 그러나 그때 사법부는 진실을 묻었고 결국 정의를 버렸다. 그리고 ‘32년 후-거기’의 재판이 열렸다. 마침내 무죄가 선고되었어도 죽은 사람들은 다시 살아오지 않는다. 그건 ‘지금-여기’의 재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32년 후-거기’의 재판으로 바로잡아야만 하는 ‘지금-여기’의 재판이 존재하는 사법부는 불행하다. 이 불행의 다른 이름은 불신이다. 사법부의 불행 또는 불신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
사법부의 신뢰회복을 거듭 강조해온 이용훈 대법원장은 취임초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문제를 언급했다. 과거에 대한 성찰이 현재의 신뢰회복에 필수적이라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와 연결되어 있는 과거를 성찰하는 일은 험난하다. ‘왜 하필 지금, 왜 굳이 우리냐’는 반발에는 나름의 무게가 실려있다. 그러나 ‘왜 아직도, 너희는 아니냐’는 질책의 무게도 묵직하다.
과거를 성찰하는 일은 결국 ‘어떻게 해야 사법부가 정의로워질 수 있을까’를 묻는 일이다. 이 성찰적 질문은 생산적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법부의 과거 중 정의롭지 않았던 역사 속에 반면교사의 의미로 함축되어 있다. 정의롭지 않음이 다 불의는 아니지만, 정의가 아니면 사법이 아니므로 사법부의 정의롭지 않음은 그 자체로 사법부의 불의다. 그러므로 정의롭지 않음을 성찰하는 일은 불의를 성찰하는 일이다. 불의를 성찰해야 정의로움에 다가설 수 있고, 정의로움에 다가서야만 사법부의 불행 또는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치유될 수 있다.
성찰은 과거로 향해 있지만 현재를 묻는다. 그렇게 성찰은 현재를 물으면서 미래를 연다. 최근 사법부가 힘을 쏟고 있는 공판중심주의의 정착과 영장심사의 강화는 이러한 성찰의 결과물일 수 있다. 정의가 진실을 뜻하는 것이라는 잠정적 의미규정에 따르면, 재판에서 정의의 승리는 진실의 발견에 의해서 보장된다.
법정에서 구술변론에 의한 진실 공방을 내용으로 하는 공판중심주의는 검찰의 수사기록에 의존해온 종전의 재판관행보다 진실을 밝혀낼 가능성이 높다. 엄격한 영장심사는 진실 공방을 위한 피의자나 피고인의 방어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해줄 수 있다.

검사 변호사 폄하는 과격·위험
그렇지만 새로운 시도의 상당 부분이 시행착오로 빠지지 않으려면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하고 주도면밀한 사전 준비작업이 필요하다. 검찰의 조서를 무조건 불신하고 변호사들을 경계대상으로 폄하하면서 상호 소통의 노력없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사법부의 태도는 과격하고 위험하다. 위이불맹(威而不猛. 위엄이 있되 사납지 않음)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다시 ‘결국 정의가 이기게 될까’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여전히 불안하다. 그렇지만 이 불안한 질문 앞에 온 몸으로 솔직하게 섰을 때 답이 보인다.
                                  

<내일신문 2007. 3. 22.자 논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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